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문단 편집) === [[명나라]]의 멸망과 청군 [[입관]] === 예친왕 도르곤과 정친왕 지르갈랑은 섭정왕이 되자 친왕, 군왕, 패륵 등의 종친들이 부족 업무를 관장하는 것을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하여 순치제 초기의 청나라 조정은 각부 패륵들이 중심이 된 합의정체에서 섭정왕 2인에 의한 통치 체제로 변화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의정왕대신회의의 권한이 크게 축소되었다. 비록 도르곤은 좌섭정왕으로서 병권을 책임지고, 지르갈랑은 우섭정왕으로 조정의 국사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청나라의 모든 권한은 순치제 즉위 직후 이미 도르곤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를 눈치챈 지르갈랑은 조정의 의결권까지 그에게 넘겨줌으로써, 도르곤은 단순히 어린 황제를 보필하는 섭정왕이 아닌 사실상의 황제로서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였다. 순치제가 즉위한 이듬해인 1644년(순치 원년) 4월, 숙친왕 호오거의 수하 하락회(何洛會)가 도르곤에게 밀고하였는데 호오거가 도르곤을 죽이고 자신이 섭정왕에 오를 것이라고 모함하였다. 이미 황위 계승을 놓고 호오거와 극심한 알력을 빚었던 도르곤은 이 말을 믿고 즉시 호오거를 체포, 숙친왕의 작위를 박탈하고 감옥에 가두었으며 그 당여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이 사건으로 도르곤은 자신의 부하들을 호오거가 거느리던 정황기와 양황기의 요직에 임명하며 청나라의 최정예 부대인 상삼기(上三旗)의 지휘권을 손에 넣었다. 이후 호오거는 백의종군으로 군공을 세워 같은 해 10월에 숙친왕으로 복작되어 1646년(순치 3년)에 사천 지역을 평정하는 전과를 올리지만 같은 해 3월 6일에 다시 죄를 받아 작위를 박탈당한 채 유금을 당하였으며, 1648년(순치 4년)에 연금에서 풀리지 못한채 사망하였다. 호오거 사후에 도르곤은 호오거의 아내를 자신의 잉첩으로 취하기도 하였다. 도르곤은 이렇게 자신에게 대항하던 이들을 제거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발판을 마련하였다. 같은 해, 중원을 차지하고 있던 명나라는 이미 틈왕(闖王)을 자처한 [[이자성]]의 농민군에 의해 세력을 급격히 잃어갔고 이자성군은 수도인 북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1644년(순치 원년, 명 숭정 17년) 4월 21일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성에 공격을 가하였고 그 다음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금성 뒤의 후원인 매산에서 목을 매 자진하였다. 이로써 명나라는 1368년 주원장에 의해 건국된 이후 277년만에 그 종말을 고하였다. 청나라의 만주족 대신들은 지금이 중원을 차지할 호기라 주장하였으나 명나라의 항장(降將) 출신으로 청나라 조정에 출사하고 있던 홍승주나 범문정 등은 이자성이 먼저 북경을 함락하게 내버려두고 때를 기다렸다가 명나라 황제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이자성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명나라로 들어갈 가장 중요한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에는 총병관 [[오삼계]]가 버티고 있었다. 도르곤은 오삼계를 여러 차례에 걸쳐 설득하였으나 별 소득이 없었다. 그러나 북경을 함락한 이자성의 군사가 오삼계의 아버지와 애첩을 끌고갔다 하자 오삼계는 분노하였고 결국 청군과 손을 잡아 산해관의 빗장을 열었다. 이로써 청군은 아무런 전투도 벌이지 않고 손쉽게 산해관에 [[입관]]하여 중원 땅으로 진입하였다. 도르곤은 이 때 총사령관으로서 청군을 지휘하여 오삼계와 연합군을 결성하였고 결국 산해관 근처의 일편석(一片石)에서 이자성군과 대치하였다.[* 참고로 일편석전투는 중국 사극인 강산풍우정(江山風雨情)에서 재현해줬다. 청군에게 우리의 전투력을 똑똑히 보여주자는 오삼계군의 결의가 돋보인다.] 청군과 오삼계군은 이자성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고 이자성은 몰래 북경으로 돌아와 자금성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이렇게 도르곤은 1644년(순치 원년) 6월 5일, 북경성을 점령하고 황궁인 자금성을 장악하였다. 곧이어 자진한 숭정제의 장례를 후하게 치루고 그 유해를 명십삼릉에다 장사지내는 등 멸망한 명나라의 황실을 존중함과 동시에 북경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그는 이어서 북경으로의 천도 작업을 서둘렀고 이자성에 의해 불탄 자금성을 복구하였다. 같은 해 10월 19일, 도르곤은 북경성 북문에서 황제인 순치제와 황족들을 맞이하고 열하루 뒤인 10월 30일에 순치제를 모시고 천단에서 제를 올려 이제 북경이 청나라의 수도가 되었으며 천명을 상실한 명을 대신하여 청의 순치제가 새로이 중국의 수명천자가 되었음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